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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중요한 한국. 나이라는 허들 앞에 우리가 해야할 선택.

Blueguy Marcus 2025. 8. 31. 22:38
나이. 

나이가 많아서 안돼.

그 나이엔 이렇게 하는게 맞지.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되는 법이야.
나이. 나이!! 그놈의 '나이'란 뭘까?
 
유럽여행을 하며 거의 들어본 적 없는 나이에 대한 질문을 여기선 밥먹듯 주고받곤 한다.
어떤 문화적 차이로 우리는 세상 그 어떤 나라보다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걸까?
한번쯤 생각해보고 싶었다.
 

2017년의 나

2017년의 나.
2025년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다르게 입는다.
다르게 말한다. 다르게 웃고 다르게 바라본다.
그게 나이가 들어서일까?
 

2019년의 나

2019년의 나.
첫 프로필 사진 촬영에 사진 찍히는 재미를 느꼈던 첫번째 순간.
2년만에 내가 또 다르게 보인다.
 
 
나 역시 10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면 체력적으로 많은 차이를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이런건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도 느낀다.
 
보통 나이는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많이 변명된다.
나이가 몇살이라 워킹홀리데이는 무리다. 유학은 무리다. 마라톤은 무리다. 새 친구를 만드는 건 무리다. 무리다.
무리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 세상 모든 가능성이 닫히고 정말 무리가 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무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걸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태도가 되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할 수 있다는 태도가 기분을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말이 적어지고, 새로운 대화의 즐거움을 잊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나이와 활력은 반비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반대의 예시 하나가 있다. 바로 내 이야기.

내 20살은 내 인생 가장 무기력한 시기였다.

내 어린시절 꿈은 가로막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치 없었던 것이 되어버렸었다.

그렇게 꿈을 추구할 수 없으니 모든게 안될거라고 스스로를 제한했다.

아기코끼리는 작은 나무기둥에도 묶여버린다.

20살의 체력은 없더라도, 나는 지금 내가 원하면 그 어디로든 떠나버릴 자유가 있다.

풍족하진 않더라도, 세계여행을 다닐 수 있다. 즐겁게 대화할 수 있고 달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일흔이 되어 나이를 이유로 쇠하려고 할 수도 있다.
반면, 팔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도전을 즐기며 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그 자체로서 에너지를 내뿜으며 다니는 기관차다.

언제나 은은한 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그의 열정을 헤아린다면 아무것도 못한다며 누워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크게 2 부류로 나눈다면, 세상 그 모든 상황에서 안되는 이유를 찾는 사람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는 앞서의 몇개의 이야기만 봐도 단순히 체력에서, 혹은 나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결국 내가 순간순간 어떤 결정을 해왔느냐가 쌓여서 방법과 핑계를 고르는 관성이 된다.
이것은, 그렇기에 오히려 언제든 핑계보다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이 또한 핑계보단 방법을 찾는 것!)
 
하나의 소소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일주일에 3번 달린다.
-여행을 간다면 하루에 10명의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 곳의 문화를 배운다.
-내가 틀릴수도 있다는 가정은 항상 해본다.
나는 이 3가지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3가지는 단순히 자기관리의 차원을 넘어서, 내 뇌를 리프레시해주는 녀석들이다.
똑같은 제안에도, 나는 아마 달린 후에 더 긍정적인 생각이 들 것이다.
'안될거 없지 뭐!'
하지만 나도 한 인간일뿐이고 이 모든 것들을 지키지못하는 때도 많다.
암울하다. 이럴땐 양은냄비처럼 끓던 텐션도 바닥을 찢고 기어들어간다.
똑같은 제안에도, 난 핑계부터 떠올릴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냥 사라지고싶을거다.
'나이땜에, 상황땜에 안될듯해'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리프레시 요소는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믿고있다.
내게 달리기가 그렇듯, 감정해소시스템 혹은 리프레시시스템, 그게 뭐든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기서 인간은 살아있음을 느끼고, '할 수 있다'라는 감각이 리프레시된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일까?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저 물 흐르듯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무엇 때문에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거지? 그냥 그런 노력 안하며 조용히 살아도 되잖아.
기념일도, 생일도, 배움도, 대화에 참여할 필요도 없다. 아무것도 필요없다.
 
허무주의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한 가지 사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무한하지않다.
사색도 좋지만, 함께 연결된 순간에 사색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자리에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진리도 좋지만, 내 시시콜콜한 조잘거림이 누군가에게 웃음고픈 하루의 웃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닌걸까?
 
내가 침묵을 선택하고 그 자리에 온전하지 못할 때, 동시에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울고웃을 소중한 기회를 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상대의 단점부터 찾아내 의식없이 뱉을 때, 동시에 상대의 장점을 말해 웃음을 줄 기회는 생각조차 못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나로인해 웃었으면 한다.
나랑 있을 때만큼 최고로 즐거웠으면 한다.
그러기위해서 입만열면 배꼽이 빠지게하는 큰 재능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눈을 더 마주치고, 더 많이 웃는다.
재밋으라고 한 얘기같으면, 웃음마저 아끼기보다 일단 웃고자 한다.(물론 그 이야기로 인해 기분나쁠 사람이 없다는 가정하에)
그렇게, 나부터 무거운 티는 그만내고 나이를 잊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싶다.
 
마지막으로 던지는, 그대의 나이보다 묻고싶은 한가지 질문.
오늘 하루도 크게 웃었나? 그리고 나로인해 적어도 한 사람이 웃을 수 있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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